반칠환 - 장어 수족관 장어들이 날렵하게 꿈틀거린다 평생 한 일 자 일획만 긋던 놈들이다 이제 일획도 너무 길어 탁, 탁, 탁 점으로 돌아가리라 한다 마침내 붓마저 버려야 얻는 절체절명의 도마필법을 얻으리라 저마다 설레어 웅성꿈틀거린다 저들이 써 온 일필휘지의 서첩은 고스란히 물 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7
반칠환 - 먹은 죄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은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7
반칠환 -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7
김광렬 - 울림 길을 걸어가는데 마주오던 수녀님이 바위틈에 핀 꽃을 보고 아, 하고 감탄사를 내뿜었습니다 나에겐 그 아, 하는 소리가 생전 처음 듣는 소리 같았습니다 퍼뜩 이 세상에는 아, 라는 감탄사도 다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길에 코피 번지듯 아름다운 울림이었습니다 저쯤 멀어진 뒤 가까이 ..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7
이외수 - 할머니가 해주신 옛날 이야기 호랑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하루살이래 하루살이 호랑이 눈가에 어지러울 때 그것을 잡기 위해 그 눈을 찟기 때문이 아니라 호랑이도 호랑이도 안다는구만 하루살이 물속에서 삼 년 동안 애벌레로 살은 뜻을.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6
고은 - 자각 잊었다 새벽 꿈속 시 한수 와 있다가 꿈 깨이자 천리 밖으로 갔다 굳이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가서 세상의 티끌이거라 나의 시라는 것들 다 남의 핏줄이니라 돌아오지 마라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윤석산 - 입적入寂 "이만 내려놓겠네." 해인사 경내 어느 숲 속 큰 소나무 하나, 이승으로 뻗은 가지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 지상으로 지천인 단풍 문득 누더기 한 벌뿐인 세상을 벗어 놓는다.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이재무 - 감나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곁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김선우 - 단단한 고요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강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조태일 - 꽃들, 바람을 가지고 논다 꽃들, 줄기에 꼼작 못하게 매달렸어도 바람들을 잘도 가지고 논다. 아빠꽃 엄마꽃 형꽃 누나꽃 따라 아기꽃 동생꽃 쌍둥이꽃 바람들을 잘도 가지고 논다. 바다에서 파도를 일으키며 놀던 바람도 산속에서 바윗덩이를 토닥이며 놀던 바람도 공중에서 날짐승을 날게 하던 바람도 꽃들 앞에선 오금을 쓰..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황인숙 - 비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박현수 - 1만 5천 마리의 하루살이 오늘도 하루살이의 전 생애를 탕진했다 오늘 저녁 어디선가 나 대신 하루살이가 죽어 가리라 목숨이란 게 그의 전 생애를 덧대고 기운 것일 뿐 나의 한 달은 서른 마리 하루살이의 전 생애 마흔이 넘은 나는 1만 5천 하루살이 목숨의 어설픈 짜집기라서 어느 하루도 그의 전 생애와 맞바꿀 만한 날은 없..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노향림 - 차마고도 목이 말라야 닿을 수 있는 길 차마 갈 수 없어도 참아 갈 수 있는 길 그런 하늘 길이면 참 좋겠다 생각하며 연필화의 흐릿한 연필 끝을 따라가 본 것 뿐인데 등 뒤가 서늘한 차마고도 차 대신 소금 한 줌 얻으려고 연필화 끝의 희미한 멀고 먼 나라 비단길 너머 비단길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김문희 - 접목 어린 가지를 싹 잘라서 남의 둥치에 붙여 길러도 참, 희한도 하지 그 잔인한 칼질을 겪어 더 좋은 열매가 열리는 것은 자라온 땅, 그 세월 허리 잘라서 떠나온 이민 모르지, 뿌리 그리워 목이 메이는 가지 끝에서 그 절실한 객지살이의 열매도 그럴지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박정애 - 진주를 모른다 맛있는 과일은 새들이 먼저 알고 애벌레도 아는 가시 속 밤톨을 밤나무는 첨부터 알았을까 상처를 안고 숨어 사는 진주조개 몸속에 말갛게 빛나는 그것이 제 이름인 줄 알았을까 제 몸이 보석인 줄도 모르면서 보름달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가슴 환히 열어 보이고 싶어 진주 남강 물..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조지훈 - 고사古寺 목어를 두드린다 조름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 리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박용래 - 뜨락 모과나무, 구름 소금 항아리 삽살개 개비름 주인은 부재 손만이 기다리는 시간 흐르는 그늘 그들은 서로 말을 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족과 같이 어울려 있다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전봉건 - 미끄럼대 놀이터나 교정에 서 있는 미끄럼대보다 더 높은 것이 아이들에게는 없다 그림을 그리게 하면 삼 층 교사의 지붕보다 더 높은 키의 미끄럼대를 그리다 하나 둘 셋 넷…… 차례차례 미끄럼대를 타고 내려오는 아이들 웃는 얼굴 입에는 물린 태양이 있다 그들은 하늘 꼭대기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유홍준 - 해변의 발자국 얼마나 무거운 남자가 지나갔는지 발자국이, 항문처럼 깊다 모래 괄약근이 발자국을 죄고 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 똥구멍처럼, 오므려져 있다 바다가 긴 혓바닥을 내밀고 그 남자의 괄약근을 핥는다 누가 바닥에 갈매기 문양이 새겨진 신발을 신고 지나갔을까 나는 익사자의 운동화를 툭 걷어찬다 ..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석정호 - 간장게장을 먹지 못했다 간장 게장을 먹다가 철갑 속의 달콤한 살점과의 입맞춤에 안달 내다가, 문득 그 식탐이 구차했다 언젠가 탁구를 배우러 간 적이 있다 구력이 오랜 회원들이 곁눈에 들어오고 하루 이틀 후, 보니 그들은 몇 백 년 동안 쌓은 성벽이었다 나의 탁구공는 성 밖에서 구르는 마른 쇠똥, 화려한 운동복의 군주..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곽문연 - 공 공은 얼핏보기에 곡선으로 되어 있지만 보이지 않는 무수한 각을 감추고 있다 몇 년간 골프를 치다 보니 골프공이 내게 한 수 가르쳐 준거다 공은 둥글게 치면 둥글게 굴러가고 모나게 치면 모나게 굴러간다 공은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되돌려 준다 이 단순명료한 법 앞에 나는 몸 따로 마음 따로일..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25
김춘수 - 또 거울 1 새벽 다섯시에 잠을 깬다. 거울 속에 내가 있다. 거울이 나를 보게 한다. 거울 속의 나도 새벽 다섯시다. 희부옇다. 희부연 나를 보니 생각난다. 언젠가 한밤에 잠 깼을 때 나는 없고 거울 속엔 어둠만 있었다. 기억하라, 나는 그때 어둠이었다. 어둠 속은 햇볕이 쨍쨍 만타萬朶의 모란꽃이다. 2 너무 일..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18
김춘수 - 눈의 기억 그해 겨울은 아주 늦게 눈이 왔다. 총소리는 너무 멀어 듣지 못했다. 족제비는 눈곷을 깔고 잠자듯 죽어 있다. 가슴패기에 피가 한 줌 묻어 있다. 죽어서도 눈이 가 있는 거기가 어딜까, 잡목림 사이 아슴푸레 길이 나 있다. 간밤에도 족제비는 싸다녔으리, 길이 이내 질척해졌다.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18
김춘수 - 또 가을 그때 누군가의 뒤에 숨어버린 까맣게 탄 한 톨의 망개알, 그때 그를 숨겨준 깊고 먹먹한 하늘, 오늘 어떤 귀 없는 새가 가고 있다.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18
김춘수 - 오늘의 풍경 엊그저께는 가까이 아주 가까이 볼기짝이 엉덩이를 따랐는데 오늘은 멀리멀리 엉덩이가 볼기짝을 밀치며 용을 쓰는 그들 모두를 위하여 나는 시를 쓴다.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18
김춘수 - 시인 3할은 알아듣게 아니 7할은 알아듣게 그렇게 말을 해가다가 어딘가 얼른 눈치 채지 못하게 살짝 묶어두게 살짝이란 말 알지 펠레가 하는 몸짓 있잖아 뒤꼭지에도 눈이 있는 듯 귀뚜라미 수염 같은 그리고 절대로 잊지 말 것 넌 지금 거울 앞에 있다는 인식 거울이 널 보고 있다는 그 인식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18
김춘수 - 뭉크의 두 폭의 그림 그의 기차의 연기라는 그림에는 기차도 연기도 없다. 산비탈 아스름히 길이 나 있다. 그의 소리라는 그림에는 소리가 없다. 그 넓고넓은 벌판을 한 무더기 억새가 흔들어댄다. 바람 때문이라고 한다. 바람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데 바람 때문이라고 한다.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18
김춘수 - 우물 너무 가까이 하늘이 떨어져 있었다. 밤에는 어디로 너무 멀리 하늘은 가 있었다. 별이 하나 숨어 있기도 했다. 물은 말라도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구나, 쭈글쭈글한 소리 하나 아직도 바닥을 맴돌고 있다. 왜 나에게는 누님이 없나,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18
김춘수 - 홍방울새 널 날려보내고 누가 울고 있다.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고 운다는 말의 울타리 안에서 울고 있다. 널 날려보내고 울고 있는 저 하늘, 어쩌나 제 혼자 저렇게도 높은,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18
김춘수 - 양말 발가락을 감춘다고 그게 양말인가, 티눈이 보이는데 양말인가, 옛날 옛적에 벌써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가신 이 새가 되셨다. 얼마나 시원할까 새는 양말이 없다. 가슴의 지문 · 우렁찬 고요/詩에서 詩를 배우다 2009.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