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 나부러지다
- 무거운 것들에 대한 가볍고 긴 이야기
솔정수 윤성조
중학생 시절 어머니 아버지가 처음으로 밭을 사시고는
몇 날 며칠을 닿아 올린 마늘밭 돌담은 돌보다 구멍이 더 많은데
골다공증 같은 구멍마다 바다가 출렁이다가도 감히 넘어올 생각 못 하고
덜그럭거리면서도 한라산쯤은 일도 아니게 받쳐 이고서는
태풍이나 큰 물난리 따위야 겨우 돌이끼로 말라붙었을 뿐
백 킬로가 족히 넘어 섬만 한 내 엉덩이가 앉아도 아무렇지 않더니만,
그러니까 그게 이십몇 년 전 아직 바람이 맵던 삼월이었지
바로 위 밭 금귤 하우스를 하는 경호네 아버지가 밭떼기로 팔고는
경진이네 구멍가게에서 한숨 안주 삼아 강소주만 밤새 부어댔다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고주망태로 우리 마늘밭고랑에 고꾸라진 칠십 노인네,
겨우 육십몇 킬로 낙엽 같은 몸뚱이 아래 담돌들이
그릇째 엎질러진 깍두기들처럼 온통 나부라져 있던 거야
동네 소문난 우리 어머니 옹고집보다 더 꼬장꼬장했던 그 돌담이 기도 안 차게
무슨 사단이었는지는 흩어진 담돌들만큼이나 말들만 무성할 뿐
대엿새 말 한마디 없이 술만 술만 약 삼아 드시던 경호 아버지는 끝내
영영 빈 소주병이 되어버렸고
다시 닿아 올린 돌담 구멍마다 바람은 그 술주정 흔적에 여태 취하는지
비틀거리고 있었지
장례식장에서 언뜻 귀 너머 들은 말로는 글쎄,
파도보다 세고 한라산보다 무겁던 건
태풍이나 물난리보다, 밤새 들이켰던 강소주보다 독했던 건
그래서 돌담이 고꾸라지고야 말았던 건
잠바 안주머니 속
몸 하나 못 가누게 참도 무거웠을, 그놈에
농자재 대금 독촉장이었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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