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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한 품밟기/나의 택견 이야기

4. 열애 그리고

솔정수 윤성조 2007. 10. 7. 01:41

참 묘한 매력이었다.

가끔은 빠지고 싶단 생각도 들만 한데, 영등포역 하이트 맥주 뒤쪽 길에서 구로공단 역 근처에 있는 전수관까지 매일 40~50여분 정도 걸어가는 것도 마치 연인과의 데이트 약속 장소에 가는 것처럼 설레였다.   중독... 그래 중독같은 매력이었다.

 언젠가 한복을 사려고 혜화동에 있는 '여럿이 함께'에 갔을 때,  차 한잔을 대접받았는데 마치 누릉지처럼 구수하고 깊은 맛에 반하고 말았다.   '둥굴레 차'였다.   염치 불구하고 두잔을 더 마시고는 한통을 샀다.   그 후로는 다른 차는 입에 댈 수 없었다.   아마 택견의 맛이 굳이 표현한다면 그런 깊고 구수한 '둥굴레 차' 맛이 아닐까?    그렇게 택견은 나를 사로잡아버렸다.  

 전산본부는 칼퇴근이라 집에 돌아오면 보통 6시 20분 정도.   저녁도 먹지 않고 옷만 갈아입고 전수관으로...   그리고 마지막 타임까지 세 타임정도 땀흘리고 집에 돌아오면 보통 밤 11시 40~50분 정도.   정 배가 고플 때면 돌아오는 길에 포장마차에 들려 국수나 수타 짜장 한 그릇으로 때웠는데 그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그 포장마차 할머니는 지금도 계실까?

 하여튼 택견과의 열애는 그렇게 달아올랐다.   태권도와 합기도 배울 때는 재미붙이는게 좀 늦게 발동걸리는 편이었는데, 이 택견에는 정말 흰 중의적삼같이 넉넉한 어떤 매력이 처음부터 나를 놓아주질 않았다.  

 때론 집에 갔다오는 시간이 아까와 바로 구로공단 역에서 내려 전수관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그럴때면 번듯한 양복차림에 땀냄새 훌훌 풍기는 전혀 어을리지 않은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는데 한번은 국수마는 솜씨가 일품인 그 포장마차 할머니가 슬며시 물어보았다. 

 "뭣하는 분이레유?   혹시 형산감유?  언제 봐두 이시간에 땀 많이 젖어서 오시데유.   언제적엔 운동하는 것 같구, 근대 어떤 때는 양복입고 오구..."   

 그래서 여차 저차 말씀드렸더니 갈 때마다 국수사리 한 옹큼 더 주시곤 했었다.

 

 대학 시절, 한복은 학생회장 선거때 운동권 측 후보나 입는 그런 옷이었다.   교복자율화 세대로 중3때부터 청바지에 길들여진 터라 그때까지  '한복 = 우리 옷이 아닌 운동권의 상징, 혹은 승복'이라는  관념에 젖어 있었지만, 막상 택견을 익히면서 움직임이 여유로운 우리 옷에 맛들인 후로는 한복매니아가 되어버려, 수련이 없는 토요일에는 으레 대학로에 가서(그 당시만해도 서울에도 생활한복 판매점은 몇 곳 되지 않았다.) "질경이 우리옷", "돌실나이", "여럿이 함께" 이런 곳을 기웃 거렸다.   퇴근 후의 복장이 청바지 대신 생활 한복바지에 윗저고리, 혹은 티 셔츠가 된 것은 물론이고 가끔씩 생활한복을 디자인 해보는 게 또 다른 취미가 되었다.

 처음 돌실나이에서 옷 한벌을 사고 그 옷을 입고 지하철로 집까지 올 때 사람들의 시선은 나의 옷 차림에 꽃혀 있었다.   오죽했으면 전철역에서 사복경찰한테 두번이나 불시검문에 걸렸으랴만, 그때는 참으로 한복차림이 사람들에겐 어색한 구경거리였고, 나 또한 처음 입고 올 때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었다.   그런데 한번 그런 시선을 뿌리치고 나니까 그 때부터는 남의 시선 의식치 않고 한복차림으로 돌아 다닐 수 있었다.   지금도 나의 생활복은 모두가 생활 한복이다..

 그렇게 택견은 회사 생활 외의 모든 면에서 나의 거의 전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말 치열한 열애였다.

 그때 전수관에서 얻은 별명이 "곰" 하고 "탱크", 그리고 "물곰".   아직까지 합기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 몸짓이 부드럽지 못하고 힘에 의존하는 스타일인데다 겨루기나 씨름할 때 무조건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게 "단순 무식한 곰" 또는 "탱크".    내가 운동한 자리의 반경 2미터정도는 땀으로 풀장이 된다 해서 붙여진 "물곰".   그리고 SBS에서 "임꺽정"이 방영되면서 얻은 또하나의 별명 "꺽정이 형님".   그러나 내겐 듣기 싫은 별명이 아니라 애인에게서 듣는 애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4월말 쯤, 애인을 떠나 보내는 심정으로 그 열애의 끈을 놓아야 할 위기가 닥쳐왔다.   당시 나는 3명의 식구들과 살고 있었다.   친구녀석 남매와 그 사촌되는 광주.   광주는 봉제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승룡이는 영어 과외 선생이 되는 게 목표였고 규숙이는 유학을 꿈꾸며 둘 다 학원에 다녔었다.   광주네 공장은 어려워(당시가 IMF 바로 전 상황으로 구조조정이니, 임금 체불이니 하는 말이 나돌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제때 월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살림살이는 대부분 나의 수입으로 꾸려가는 실정이었다.    제주도에서 살다가 서울에 가니까 움직이는 데마다 돈이 드는 느낌이었다.

 어찌어지 버티다 4월 초가 되니까 교통비만으로 용돈을 써야 했다.   사무실에서는 체중조절이라는 명목으로 점심을 건너 뛰었고 나중에는 전수관비 내기도 어려웠다.   마침 전수관도 지하에서 태평양 화학 맞은 편 3층으로 옮기고 있어서 전수관의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때라 수련비 못내는 것이 내내 맘에 걸렸다.   전수관 이전 준비가 한창인 어느날 (1주일 동안은 이전관계로 방학이었다) 퇴근 길에 관장님을 찾아가서 매트까는 것을 도와주고 난 후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저어, 선생님, 한 두달 정도 쉬어야 될 꺼 같습니다."

 "아니 왜요?  지금까지 제일 열심히 해왔잖아요."

 "죄송합니다.   지금 사정이 수련비 낼 처지가 되지 못해서요.    상황이 나아지면 꼭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한참 택견의 몸짓에 흠짓 맛을 들이던 시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불같은 사랑을 접어두고 애인에게 이별을 통고해야 했었다.    한두달 정도라고는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김현국 선생님께는 그저 담담하게 말씀 드렸지만, 가슴은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랑인데, 내가 먼저 헤어지자 얘기를 해야 하다니...   그때는 정말 택견 못할 바에는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참 아픈 열애였다.   어쩔 수 없이 애인에게 내입으로 당신을 위해 우리 헤어져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참 잔인한 4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