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블로그 "솔정수 - 솔나무 그늘 아래 맑은 샘터" 로 오세요

네이버 블로그에서 "솔정수"를 치세요! 더 많은 글들이 있습니다.

솔나무 그늘 및 맑은 샘터 - 솔정수(naver 블로그 "솔정수 - 솔나무 그늘 아래 맑은 샘터"로 오세요. 자세히보기

나를 향한 품밟기/나의 택견 이야기

5. 내제자의 길

솔정수 윤성조 2007. 10. 31. 01:31

 "성조씨, 전수관 다 옮기면 들어와 같이 살면서 도와 줘요.   언제 내가 돈보고 택견하는 거 봤습니까?    얼마 후면 전국대회에 나갈 서울 대표 뽑는데 당분간 그것에만 매달립시다.    새벽 프로 훈련 도와주고, 전수비는 성조씨가 들어와서 살림맡는 것으로 대신하구요."

 가슴 속으로 눈물이 흘렀다.

 택견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만해도 얼마인가?   그것도 내제자로 들어와서 배우게 됐으니...

 일주일 후 전수관 이전식을 했다.   치우패들(택견시범단)도 와서 앞길에서 길트기 시연도 보이고 전수생들도 풍물패와 함께 전철역까지 홍보하러 갔다 왔다.   치우패 시연을 통해 쟁쟁한 선수들과도  직접 대면하게 되었고 택견의 멋스러움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좌행수님의 시연은 마치 학춤 같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영등포 집에서 간단한 책들과 옷가지 몇개 가지고-원래 많지가 않았지만- 전수관에 들어갔다.   군대에서 취사장에 있었던 터라 요리는 자신 있었다.   시장도 가까왔고 무엇보다도 관장님이 소장하고 계셨던 많은 무예관련 자료들을 맘껏 볼 수가 있었고, 퇴근 후에는 오로지 택견에만 전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당연히 돈쓸 일도 줄어들게 되었고...

 서울 대표 선발전 준비에 들어갔다.   선수는 관장님과 나.   우리 전수관 대표급 실력자가 한 명 있었지만, 전국 대회 전에 입대할 거라서 결국 관장님과 단 둘이서만 나가게 되었다.

 관장님은 이미 현역 중 최고수였다.   라이트급에서 적수가 없다는 말을 치우패 단원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앨범에도 온통 시합 사진, 메달 건 사진들이었다.   부산에서 올라 오신 이후로 택견 외에는 해본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런 고수의 내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   내 택견 인생의 큰 주춧돌이 되었던 기회였다.

 헤어져야 했던 애인과 더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기분, 아마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젠 이별 걱정없이 맘껏 사랑할 수 있다는...

 관장님은 먼저 경기에 대한 나의 부담부터 덜어주었다. 

 "가보면 성조씨가 제일 경력이 짧을 겁니다.   다 몇년 씩 경기장 물을 먹은 사람들이니, 그냥 경험삼아 붙어보세요.   운좋으면 붙을꺼고, 워낙 쟁쟁한 선수들이니까 몸 한번 부딪겨 보는 것으로도 시야가 더 넓어질 겁니다.   그게 가장 큰 경험이 되겠지요."

 성적에 관계없이 그냥 경험삼아 참가하라는 것이다.   당연히 되지 않을 거니까 그냥 즐겨보란다.

 부담없이 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만한 훈련이 될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서울의 대표 선발전이 아닌가?   각 전수관에서 모여들테니 아무리 경험삼아 나가는 거라지만 허접하게 나갈 곳은 아니지 않는가.   입에서 단내가 펄펄 날 정도로 연습했다.

수련이 모두 끝나면 보통 밤 11시 반까지 관장님과 스파링 훈련과 발차기 훈련, 방어 훈련을 반복했다.   끝나면 이불 펼 것도 없이 소파나 매트바닥에 그냥 쓰러져 자곤 했는데 정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새벽6시부터는 장년층 어르신들을 위한 수련프로가 있어서 나도 참석하고 가끔은 관장님이 내게 지도를 맡기기도 했다.

 정말 전수관과 직장만을 오가는 생활이었다.   새벽 5시부터 출근 준비해야하는 7시 10분까지, 그리고 퇴근 후 7시부터 11시 반까지 택견말고는 할 게 없었다.   어느덧 수련과 훈련이 주 생활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 내 꿈 중 하나는 직접 전수관을 운영하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처럼 택견에 묻혀 살고 싶은 것이다.   꿈은 이루라고 있는 거고 간절한 소망이 현실을 만들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오늘도 그런 꿈을 꾸며 산다.

 다시 1996년으로 돌아가자.

 힘들었다는 표현보다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즐겼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계속되는 수련과 겨루기 연습에 숨이 차오르기는 했지만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를 때 땀처럼 몸을 감싸도는 그 쾌감이란 경험해본 사람들은 다 알게다.   마치 마약같은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다리찢기를 할 때 처음에는 굉장히 아프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다리가 어느 정도 벌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고통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쾌감이 느껴진다.   잘은 모르지만 과다한 아드레날린 분비 후에는 아편보다 더 강한 엔돌핀이 분비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엔돌핀은 가장 강한 진통제이자 마약같은 쾌감을 준다고 한다.    아마 그런 쾌감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숨찬 감이 느껴지지 않게되고 근육의 비명도 없어진다.   지칠 것도 같은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보자 하다보면 내가 지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해주는 관원들이 먼저 나자빠 지는 것이다.

 옆길로 새는 얘기일지는 모르지만, 제주도로 내려와 소속을 바꿔(이 사연도 나중에 이야기 되겠지만) 한국전통택견협회-신한승 선생의 택견을 이어가는, 무형문화제 예능보유자와 교육 보조 조교가 소속되어 있어 문화재청의 관리를 받고 있는 단체-에서 다시 택견을 수련하게 되었는데 4년전에 서울에서 한풀 사범을 했던 분이 택견을 배우겠다면 들어와 한 1년을 같이 수련한 적이 있었다.   그는 발기술 보다는 태기질(걸이와 넘기기 기술)에 관심이 많아서 자꾸 대걸이-무릎 이상 부위에 대한 발차기를 배제하고 걸이와 넘기기 기술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경기방식-를 해보려고 했다. (한풀에서 발기술을 하수의 기술이라고 잘 안쓰고 손기술과 태기질을 많이 강조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도 몸으로 직접 한풀의 태기질과 택견의 태기질을 엮어보고 싶어했던 것 같다.)   유동자-전통택견협회에서는 단, 급이란 용어대신에 동, 째란 급제를 사용하고 있다-가 아니면 공개적인 대걸이를 하지 않도록 하고 있었지만, 자꾸 대걸이를 해보고 싶어하는지라,  관장님(지상선 선생님-나의 두번째 택견 스승님) 이 나한테 상대해보라고 해서 한 석달정도 매일 같이 대걸이를 받아준 적이 있었다.   나중에는 내가 더 대걸이에 미쳐서 한번은 두시간동안 계속 상대를 바꿔가며 대걸이를 한 적이 있다.   맞서기도 그렇거니와 대걸이도 자꾸 하다보면 어느 정도 자신의 호흡을 느끼고 그 것을 어느 정도 조정하여 호흡뺏기 당하지 않도록 할 수 있게 된다.   그때도 호흡을 진정시키며 페이스를 지키다보니 지치다거나 숨찬 것보다 묘한 쾌감에 시간의 흐름도 망각하고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돌아가며 상대해주던 다섯 명의 동료 관원들이 먼저 쓰러져 관장님이 중단시킬 때까지 정말 뭐에 홀린 것처럼 했었다.(그 날 이후 대걸이를 요청했던 분은 사흘 동안 나오지 못했고 다시는 내앞에서 대걸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말 운동에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런 경우일게다.

 김현국 선생님과 나는 매일 그렇게 훈련에 몰입했다.    정말 택견에 미쳐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