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의 짧은 시 모음
별똥별
옳거니 네가 나를 알아보누나
혼자 술 마시다가
파리채로
파리를 쳤다
놓쳤다
잘했다 잘했다 아주 잘했다
혼자 술 마시다가 파리채로 파리를 잡는다는 것이 그만 허공만 휘두르는 그런 일이어도 파리의 목숨을 그대로 놓았다는 것에 스스로 만족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사람 목숨도 파리 목숨과도 같기 때문일 것이다
한 순간 내가 한 행동이 어떤 목숨을 위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굳이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짓밟는 것에만 연연해서는 안된다는 것일 것이다 사람 만큼 지독하게 생명을 홀대하는 것은 없다 모든 세상의 자연이 사람의 행위에 무방비하게 무장해제된 채 억압당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람 만이 자기 몸이 아닌 도구를 이용해 세상의 자연과 생명을 잡는다 파리채로 파리를 잡는 일도 그 행위의 하나다 술 마시고 파리를 잡았기에 망정이지 맨정신이였으면 파리의 목숨도 끝이다
비단 이러한 마음은 파리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상이 파리였지만 파리처럼 생각하는 한 사람의 마음을 향하여 있다면 어떻겟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면 사람의 마음은 늘 또 다른 삶의 길을 방해만 하고 산다는 것이다 우리 삶이 남에게 방해되지 않는 삶은 무엇이겠는가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詩다
- 임영석
전화선 아래 지나가며
오 전신주와 전신주 사이의 전화선 같은 영광 있으라
언제까지나 그렇게 이어져가고 있어라
온갖 사연들
그 아래로
눈 내린다
싸락눈이었다가 점점 함박눈으로 내린다
눈 내리는 날
눈 내린다
마을에서 개가 되고 싶다
마을 보리밭에서 개가 되고 싶다
아냐
깊은 산중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곰이 되고 싶다
눈 내린다
눈 내린다
알흔 섬
*알흔 섬 : 바이칼 호수에 있는 섬
느린 갈매기
느린 소
느린 아이 둘
기억
가을
가을 하늘이 왔다
아주 잊어버린 이름들이 하나하나 가슴에 박혀 새로 돌아왔다
미류나무
큰 바람에 입 다물고 하루 내내 견디었소
큰 비에 두 눈 감고 지긋이 견디었소
이윽고 비바람 자니 1만 잎새 일어나오
곰
저 늙은 곰
겨울 나고
세상에 나오는 것 봐
제 새끼
등짝에 업고
나오는 것 봐
아득하여라 나도 언제였던가 저렇게 느린 걸음이었다
어슬렁
어슬렁
너에게
걱정 마라
또 바람이 분다 바람에 빈 가지들 뛰논다
또 너에게
바다 밑
고기떼
바다 위
갈매기
내 고향은 허허 이렇소이다
그리움
잠 깨어
천둥소리 나머지를 듣는다
아버지 세상을 떠나신지
40년이 되어간다
어머니 떠나신지
벌써 10년이 되어온다
천둥소리 뒤로 비가 온다 그제서야 잎사귀들 후두둑 깨어난다
니나노
목포 삼학도에 갈거나
제주도
제주도 서귀포에 갈거나
10년 병석에 누워 있는 오 영호의 꿈 속 끝 간데 없이 긴 니나노
어느 자화상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국경이 있다
그 국경 언저리
오도 가도 못하는 무국적자가 있다
그 단어들의 사생아인 시인
새끼 넙치
방금 낚시바늘에 걸린
새끼 넙치의 절망
그 절망으로
물 위에 떠오르며
퍼덕이는
그 절망 속의 희망
오늘 친구의 아들에게 친구의 안부를 물었다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한다
그래도 이 세상에는 퍼부어댈 욕이 있다
태종대
태종대에는 눈물이 없다
사람들아 여기 와서
한 방울의 눈물이 되어 드려라
그 아비
딸이 오는 날
제라늄화분 여섯이
일제히 꽃들을 피웠다
딸이 가는 날
늙은 내 손가락 씀뻑 벴다
흰 나비
보아라
저 어리석은 바다 위를
지혜귀신
한 마리 흰나비가 날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책들 닫혀 있다
강설
천년 전 나는 너였고
천년 후 너는 나이다
이 둘의 귀로 함께 귀 기울인다
한밤중 눈 내린다
소리 없이
소리 없이
귀 기울인다
낙엽
내 봄 내 여름날로는
내 반생
내 껄렁껄렁한 여생으로는
도저히 네가 될 수 없어라
저 봐
저 봐
지는 떡깔나무잎새 넷 다섯 여섯
숨
막 숨 거둔 사람의 얼굴 고요타
그 얼굴 기슭
아직 남아 있는 숨 꼬리
고요타
애통 사절
하령에게
웬일로 바람 잔다 풀들의 울음 뚝 그쳤다
새끼도랑물 소리
새끼도랑물 소리 서로 속삭인다
바다 그 배래
아직 어디인 줄 몰라
쓰지 않은 시가 훨씬 더 시이다
귀
이 세상 넘어
다른 세상에서 누가 온다
밤빗소리
누가 그 세상에 간다 꼭 만나리라
비닐봉지
쪽파 두 단 담아온
검정 비닐봉지
빈 비닐봉지
괜히 바람 한 자락에 날아올라
저 혼자 춤추더라
춤추다가
울 넘어 시시부지 가버리더라
어머니
늦은 깨달음
뒷산 달빛 가랑잎새 없다면
마당귀
살구나무 살구꽃 봉오리들 없다면
저 칠산바다 파도 밑으로
나 모르게
우르르 몰려가는
참조기떼 없다면
그 참조기떼 귀신들 없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못한다 옥아 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