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시인의 짧은 시
새
그래
너 한 마리 새가 되어라
하늘 날아가다
네 눈에 뜨이거든
나려와 마른 가지에
잠시 쉬어서 가라
천년 고목은
학같이 서 있으리니
어떤 유화
오래 된 유화가 갈라져
깔렸던 색채가 솟아오른다
지워 버린
지워 버린 그 그림의
어떤 오후
오래 쌓인 헌 신문지를
빈 맥주병들과 같이 팔아 버리다
주먹 같은 활자로 가로지른 기사도
5단 내리뽑은 사건도-
나는 지금 뜰에서
꽃이 피는 것을 바라다보고 있다
달무리 지면
달무리 지면
이튿날 아침에 비 온다더니
그 말이 맞아서 비가 왔네
눈 오는 꿈을 꾸면
이듬해 봄에는 오신다더니
그 말은 안 맞고 꽃이 지네
전해 들은 이야기
잔주름져가는 눈매를
그녀가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이제는 사람의 눈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그런 아쉬움이 아니오
중년부인이란 말이 서운하여서도 아니다
그녀를 그렇게 슬프게 하는 것은
세월도 어찌하지 못하는, 언제나 젊은 한 여인이
남편의 가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기다림1
밤마다 눈이
나려서 쌓이지요
바람이 지나고는
스친 분도 없지요
봄이면 봄눈 슬듯
슬고야 말 터이니
자욱을 내달라고
발자욱을 기다려요
후회
산길이 호젓다고 바래다 준 달
세워 놓고 문 닫기 어렵다거늘
나비같이 비에 젖어 찾아온 그를
잘 가라 한 마디로 보내었느니
축복
나무가 강가에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나무가 되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새들이 하늘을 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새들이 되어 나란히 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편지
오늘도 강물에
띄웠어요
쓰기는 했건만
부칠 곳 없어
흐르는 물 위에
던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