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 시인의 짧은 시 모음
첫 비 - 맹꽁이에게
너 아직 누웠거라
맹인 걸음으로
봄비는 오느니
오는 비 간다 하고
가는 비 온다 하고
귀머거리 시늉으로
무덤 속인 양,
허시(虛詩)
내 시의 문장은
타고 남은 서까래다
풍장이 남긴 뼈다귀다
이것저것 다잡아
상한 몸 엮었더니
서서 죽은 인골탑!!
첫사랑
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
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 이빨로 깨트려 준 눈깔사탕
춘봉이 받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
여기, 간신히 늙어버린 춘봉이 입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텅
범종이 울더라
벙어리로 울더라
허공에서
허공에서
허공은
벙어리가 울기 좋은 곳
허공 없으면
울 곳 없으리
글쎄
글쎄
산기슭에
홀아비가 살았더라
살다가 죽었더라
빈 집은 헐었더라
헐다가 내려앉았더라
싸리울 너머
배경만 어림잡아
허공 십만 평이더라
혼자서 부른 노래
살아서 텅 빈 날은 당신 없는 날
죽어서 텅 빈 날도 당신 없는 날
당신은 텅 빈 날만 아니 오십니다
달팽이 약전略傳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生이 있었다
깃발
오직,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그것 아니다 모든 날개 있는 것들은 애써 자기의 깃털로 바람을 만들고 스스로 깃발이 되어 허공을 트고 사라질 뿐!
수평선 보며
그렇다, 하늘은 늘푸른 폐허였고
나는 하늘 아래 밑줄만 그읏고 살았다
마치, 누구의 가난만
하늘과 평등했음을 기념하듯이,
당신
당신, 돌을 던져서 쫓아버릴 수 없고
당신, 칼로 베혀서 져버릴 수 없다
차마, 사랑은 물로 된 육체더라
풍경風景
더위가 맹위를 떨친 여름 낮 한때를 소나기가 한바탕 후려치자 비를 피해 서두르는 사람들의 숨가쁜 광경을 길가의 가로수들이 바라보다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내며 싱싱하게 날비를 맞고 있는
깊은 밤
대숲에 이슬 내린 소리 받아 들으니
밤중도 자궁 속 같습니다
아, 전생 같은 오늘 밤
나그네
뱀은 나그네
뱀은 갈 길이 따로 없다
뱀은 자기 몸이 길이므로,
그러나 자기 몸의 길이가 짧은 길을 멀리도 가는구나
낙차
마음놓고 듣네
나 똥 떨어지는 소리
대웅전 뒤뜰에 동백나무 똥꽃 떨어지는 소리
노스님 주장자가 텅텅 바닥을 치는 소리
다 떨어지고 없는 소리
경내境內
하늘이 조용한 절 집을 굽어보시다가 댓돌 위의 고무신 한 켤레가 구름
아래 구름보다 희지고 있는 것을 머쓱하게 엿보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