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정수 윤성조 2009. 5. 22. 21:11

  두줄시에 나타난 정서

  서정시는 일인칭의 문학이다. 내가 나의 정서를 표현하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그가 느끼는 정서를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을 동원하여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정서를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시는 자기표현(self-expression)이라고 한다. 자신의 주관적 경험과 내적 스타일을 자기 독백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시이다. 그래서 서정시를 흔히 '엿들여지는 독백, 경험의 독백적 표현이라고들 한다. 서정시는 전달이 아니라 표현이므로 청중이 필요없다. 세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직접적 관계 속에 자신의이미지들을 제시하는 것이 서정 형식이다. 시 주관성의 실체는 장르 명칭에 함축되어 있듯이 서정이며, 그 서정은 시인 자신의 정서 자체라 할 것이다.

  그 정서는 그것이 기쁨이거나 슬픔이거나 때로는 분노이거나 간에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서정적 감동과 파토스적인 감동이 그것이다. 서정시는 말할 필요 없이 서정적 감동을 주는 것이다. 서정적인 것은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시적 세계관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서정시에서 자아와 세계는 분리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대결하는 것도 아니다. 서정적인 것은 적대 감정이 아니라 조화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살에 비친 내 얼굴
    물살 멈출까 차라리 눈을 감는다.

                    -최병두의 '고백'

  흐르는 물살에 이지러진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혹시라도 물살이 멈추면 남에게 보이기 싫은 자신의 얼굴이 비칠까 홀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무도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부끄러운 얼굴일지라도 아무 상관이 없을 터인데도 자신이 자신의 부끄러운 얼굴을 스스로 두려워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이렇게 솔직하게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신을 고백하는 정서를 노래한다. 서정적인 것은 남에게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 때문에 어떠한 갈등도 있을 수가 없다.

        세상사람 세 줄로 세울 수 있다는데 그럼 난 누구랍니까?  

        도둑과 거지와 바보 중에서-  
              -주정연의 '도둑과 거지와 바보'

  이 시에서 자아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도둑과 거지와 바보 속의 어느 하나라고 한다. 이런 자아와 어느 누가 갈등을 일으키겠는가? 서정시에서 유동적인 요소인 정서는 모든 고정된 것을 융해시켜 자아와 세계가 구분되지 않는 혼융의 상태를 보여준다. 나는 도둑이 되어도 거지가 되어도 바보가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세상 모두를 하나로 포괄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노을도 숨을 죽인 저 하늘 정원에  

       옷고름을 풀어 혜친 여인의 가슴.  

             -고중영의 '만월'

  고중영 시인의 이 시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정서를 만난다. 노을도 숨을 죽인 하늘에 옷고름을 풀어 헤친 여인의 가슴이 그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달은 옛날의 달이 아니다. 아무런 생물체도 살 수 없는 불모의 거친 세상이 달이다. 그런 달을 부드러운 여인의 가슴이라 한 것이다. 만월을 자신의 고운 정서로 내면화함으로써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정적 감동과 달이 우리에게 불운과 고뇌와 격정 등 절제를 떠나 방황하는 마음의 상태에서 느끼는 파토스적 감동이 있다. 이는 격정과 적대감정으로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갈망이 나타난다. 그래서 서정적인 것과는 달리 파토스적인 것은 무엇을 욕구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시인은 그것이 '있어야 함'을 강변하게 되고, 독자는 그 시인의 정서에 감동하여 세계에 대한 적대 감정에 흔쾌히 동감하는 것이다.

       창문 밖에서 서성이던 낯익은 푸르름  

       망월동에 터잡은 잊고 있던 친구였네  

             -조희범의 '오월' 

  파토스적 감동의 시는 저항시가 될 수 있다. 조희범의 시는 우리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제재로 한 시이다. 20여 년 전 광주에서 민주를 외치자 죽어간 친구를 생각하는 자아의 정서에 우리 독자 깊이 동감하면서 그러한 역사를 만들었던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와 같은 대립과 갈등이 다시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된다며 서정시에서 부드러운 감동을 찾아 아름다운 시의 정서를 맛보게 된다. 파토스는 대립과 갈등을 본질로 하는 극의 본령이지 서정시에는 원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출처 : 두줄시
글쓴이 : 두줄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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